중국의 동북공정

동북공정이 뭔가요?

동북공정은 ‘동북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을 줄여 부르는 용어입니다. 중국의 동북 3성인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의 역사, 지리, 민족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업입니다.

중국 정부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연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이 사업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북공정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사, 부여사, 고구려사, 발해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펼치며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이 나라의 땅이었던 곳을 현재 중국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가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경내에 건국된 국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고구려는 현도군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건국한 국가이며 건국 이후 한번도 중국의 영토 내부에 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삼국지(三國志)』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아 그 가운데 조복과 의책을 놓아두면 세시(歲時)에 와서 가져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현도군과 고구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대목인데, 현도군과 고구려 사이에 경계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조복과 옷, 책을 두면 가져가주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지배관계가 아니라 고구려가 중국과는 다른 독립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으므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사실입니다. 당시 조공책봉관계라는 것은 전근대시기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중국과 맺었던 외교형식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한국 고대 국가 와 중국 고대 국가의 관계는 해당 내역이 ‘명분상’ 조공·책봉 관계였음을 중국 전문가들도 인지하고 실제 상황을 구분하여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독 고구려에게는 실상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발해가 중국의 역사라고?

 중국 학계에서는 건국자인 대조영 뿐만 아니라 발해 주민이 말갈족이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근거로 삼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위 두 서적을 모아 해석해보면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이고 발해 사람들은 속말말갈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발해의 주민에 말갈인이 포함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당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었으며 발해의 지배층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이 구성하고 그들이 중심을 이룬 국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해가 자신의 뿌리를 인식하는 범위에서도 고구려나 부여 등 대한민국의 역사와 결을 같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夫餘)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였고, ‘고려국왕(高麗國王)’ 혹은 ‘천손(天孫)’이라 하여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뿌리를 고구려(고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중국학자들은 발해가 요(遼, 거란)에 망한 뒤, 유민 대부분이 요의 백성으로 살아갔고 고려(高麗)로 들어간 이들은 소수였다는 이유로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합니다. 발해가 요에게 망했고 현재 거란족은 중국의 중화민족 중 하나이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잘못된 내용입니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이 요에 항복하였지만, 발해인들은 부흥운동을 일으키며 요의 집권을 거부했습니다.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살펴보아도 후발해(後渤海)·정안국(定安國)·흥요국(興遼國)·대발해(大渤海) 등이 있고 그 중에서도 후발해와 정안국의 존속기간은 수십년을 넘습니다. 또한, 발해 이후 건국된 ‘고려’에서 발해 유민을 수용하고 이후 국제관계에서 거란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발해와 고려의 계승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수만 호의 백성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왔습니다. 또한, 대광현 말고도 발해 유민의 집단적 고려 이주가 지속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고려는 요가 사절을 보내왔을 때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며 수교를 거부하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이기도 했습니다.

참고문헌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17

한중역사현안바로알기, 동북아역사넷, URL: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iscd.d_0003